지휘자의 왼손

 

   지휘자가 조명을 받으며 무대 위로 씩씩하게 걸어나온다. 청중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곤 악단을 향해 돌아선다. 무대를 꽉 채운 단원들을 재빠르게 훑어본다. 80명이 넘는 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휘자에게 가 꽂힌다. 이윽고 지휘자가 팔을 들어올린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팽팽한 긴장감이 연주회장을 휘감는다. 저 팔이 움직이는 순간부터 우리는 오늘 선택된 음악을 향해 교향악단과 함께 항해를 해야 한다. 순항이 될지 난항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음악회장을 찾은 나는 줄곧 지휘자의 뒷모습만을 바라본다. 어떤 표정으로 지휘를 하는지 몹시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다. 두 팔이 말하는 걸 헤아리고 지켜볼 뿐이다. 점점 빠르게 음이 전개되는가 싶더니 광풍을 만난 듯 신들린 몸짓으로 지휘봉을 몰아친다. 단원과 청중들은 정신없이 요동치는 음률에 휩쓸려 혼이 빠진다. 차츰 바람이 잦아들고, 지휘봉은 미풍에 나부끼는 꽃잎처럼 부드럽고 섬세하게 선율을 고른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휘봉보다 비어있는 지휘자의 왼손에 마음을 빼앗긴다. 가야할 길을 명확히 짚어내어 빈틈없이 몰아가는 지휘봉은 딴눈파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콕콕 찍으면 지적받은 악기는 정확한 순간에 연주를 해야 한다. 두 팔을 있는대로 휘두르면 호흡이 있는 한껏 관악기를 불어야 하고, 줄이 끊어지도록 온 힘을 다해 현을 긁어내려야 한다. 투정을 부리거나 엄살을 피울 수도 없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악단 속에 자리잡으면 지휘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지휘봉을 든 지휘자는 독재자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지휘자의 곡 해석에 따라 같은 음악이라도 전혀 다른 음색을 드러낸다.

 자휘봉이 아렇게 음의 골격을 세우는 거라면 지휘자의 왼손은 색을 칠하고 맛을 내는 역할을 한다. 물론 해일을 일으키듯 지휘봉과 함께 솟구치기도 하지만 대부분 왼손은 음을 부드럽게 다스리는 역할을 한다. 모난 돌을 감싸듯 예리한 선율을 보듬는다. 부드럽게 음을 유인해내고 조용히 마무른다. 음 하나라도 놓칠새라 찬찬히 그러모아 본대에 합류시킨다. 그 모습이 마치 참빗으로 정갈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쪽을 찌는 어머니의 손길같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그토록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며 음양의 조화란 저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직선과 곡선, 강직함과 부드러움. 어느 것이 더 비중있다고 우가는건 어리석다. 서로 다른 두 성질이 맞물려 이루어내는 아름다움을 우린 수없이 보아오질 않았는가. 빛은 아무리 먼 곳까지라도 곧게 나아가지만 우주의 운행은 모두 동그라미를 그린다. 곧게 뻗은 나무에 열린 열매들 역시 원형이다. 직립해 있는 인간들의 육신은 온통 부드러움에 휩싸여 있다. 손가락 끝조차도 둥글둥글하다. 이런 조화를 잘 이루어내는 지휘봉과 왼손.

 한 번씩 요란하게 쳐 대어 흥을 돋구는 심벌즈조차 지휘자의 왼손이 살그머니 오무라들면 귀청을 찢을 듯 울려대던 소리가 금세 은은한 울림으로 변한다. 낮은음자리표만 연주하던 악기들도 왼손이 정중하게 들어올리면 무대의 주인공이 된 듯 당당히 어깨를 편다. 언제나 악단의 맨 앞자리에 앉아 눈부신 조명을 받던 수석 바이올린 주자도 왼손이 가만가만 다독이면 아기처럼 유순히 잠들고 만다. 왼팔을 활짝 펼치면 음이 더욱 확산되고, 가슴께로 살며시 갖다대면 공기 속으로 음이 사라지듯 고요해진다.

  그러고 보니 세상을 호령하는 듯 보이던 지휘봉도 왼손이 없으면 대중없는 연설자애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토록 혼미에 빠져든건 저마다 지휘봉만 잡으려고 달려들기 때문인건 아닌지.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수레를 끌기가 쉬운 법인데...

 어머니처럼 따뜻한 손길로 아픈 이마 만져주고, 넘어진 아이 일으키며, 못난 자식일 지라도 함께 품에 끌어안는 지휘자의 왼손을 나는 사랑한다. 지휘봉은 안들었지만 지휘봉보다 더 많은 일을 해 내는 왼손같은 사람이 그립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명령보다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걸 깨닫게 된 음악회였다.  

cement_up.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