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턱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친구가 13년만에 고국에 다니러 왔다. 반가운 친구를 맞이하느라 내 앞치마에선 바람이 일었다. 우리 집을 방문한 친구는 13년간의 공백을 일시에 만회하려는 듯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그간의 내 삶의 흔적들을 찾아내려 애썼다. 안방에 들어가 책장을 살피며 나오다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한 친구가 대뜸 하는 말,

 "이 문턱은 꼭 있어야 하는 거니?"

 나는 그곳에 문턱이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인식했다. 20년 가까이 아파트 생활을 해왔는데도 문턱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의 불평어린 말은 계속 되었다.

 "친정집에서 어쩌다 청소기 좀 밀어주려면 도대체 그 방문턱 때문에 번번히 청소기를 들어서 옮겨야 되더라. 한옥에선 필요할지 모르지만 아파트는 온통 내실인데 굳이 문턱을 놓아야 하는 까닭을 모르겠어. 생활방식이 바뀌었으면 생각도 합리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냐구."

 

 친구는 우리가 지탄하고 있는 사대주의에 물든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끝없이 고국을, 친구를 그리워하며 한국의 생활양식을 잊지 못해 이번에 나와서도 우리 고유의 멋을 찾으러 다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친구의 예리한 지적은 溫故知新 차원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東西간의 문화적인 차이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며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한걸음 비껴난 곳에 서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쓰며 사는 친구였다.

 

 막혔던 물꼬가 트이듯 13년의 시간을 단숨에 풀어제끼곤 친구는 돌아갔다. 나는 새삼 아파트를 휘휘 둘러보았다. 문이 달려있는 곳엔 영낙없이 볼록하게  턱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것을 불편하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청소기를 밀다 걸리면 당연한 듯이 들어 옮기면서도 스르르 미끄러지듯 굴러다니면 편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본래의 자리에 놓여있는 것이 주는 자연스러움. 몸에 배인 그런 의식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문턱은 문짝의 밑에 닿는 문지방의 윗머리를 뜻한다. 또한 어떤 일이 아주 가까이 왔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흔히 우리는 자신의 뜻대로 상대하기 어려운 상황을 접할 때 '문턱이 높다' 라는 표현을 한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라는 말도 곧잘 쓴다. 즉 문턱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선인 셈이다.

 한옥에서의 문턱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문을 열면 바로 바깥이었기에 바람이나 먼지를 차단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치였던 셈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문지방에 걸터앉거나 밟고 다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다. 누워계신 아버지 머리위로 지나 다니는 것을 금기시 하셨듯 어머니는 문지방을 신성하게 여기셨던 것이다.한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는 문지방을 넘지 않도록 단도리하기도 하지만 완벽한 은닉은 기대하기 어렵다. 뚫어진 창호지 문 틈으로 새어나오듯 비밀스런 말은 날개를 달고 새끼를 쳐서 온 동네를 돌아다닌다.

 

 문턱이 아기들을 쉽게 마루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구실도 하지만 대개는 걸려 넘어지게 하고야 만다. 아기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처음 만나는 장애물인 것이다 그 장애물을 넘어서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지만 그 때부턴 예상치 못한 위험이 수도 없이 도사리고 있다. 방안에 있으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데도 아기는 높은 걸림돌을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자꾸만 자꾸만 기어나간다. 그러다 마루에서 떨어져 울지 않은 우리 선조들이 있었던가.

 

 문짝이 꼭 닫히도록 받침대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문턱은 사실 폐쇄적인 우리 사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혈연이나 地緣, 學緣을 빼놓고는 우리 사회를 이야기할 수 없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몇 마디 건네고 몇 다리 건너면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찾아낸다. 그리곤 금세 친밀감을 표시한다. 그러나 아무리 여기저기 헤집어보아도 인연닿는 고리를 찾을 수 없으면 은연중에 서먹해지고 만다. 어떤 경로를 통하든 일단 울타리를 넘어서면 동질감에 쉽게 마음을 터놓지만 문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상당히 배타적이다. 예전의 班常階級 역시 자신들의 공간에 아무나 쉽게 드나들지 못하게 만든 일종의 보호막이요 높디높은 문턱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많은 금줄을 걸어놓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기 보다는 도피성이 농후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아무나, 무엇이나 슬금슬금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턱없이 문턱을 높게 만들어 놓는다. 사람을 만날 때도 일을 해나갈 때도 스스로 설정해 놓은 기준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래도 나는 그걸 탓하지 않는다. 몸에 배인 불편함은 이미 불편한게 아니다. 처음부터 높았으니 당연하게 여긴다.

 

 이제야 문턱의 문제점이 눈에 보인다.무엇이 드나들어도 걸림이 없이 자유로운 상태. 그건 열린 마음을 뜻할텐데 편견의 잣대와 다글다글 달라붙는 욕심을 버리면 내 안의 걸림돌이 사라지고 평지가 될까? 꽁꽁 쥐고 있던 까탈스런 고집과 교만을 풍선놓듯 놓아버리면 방바닥과 마루가 수평을 이루어 바퀴가 매끄럽게 굴러갈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내가 꿈꾸고 있는 것들이 현실을 초극한 거칠 것 없는 삶이라 해도 방 하나 만큼은 문턱을 낮추고 싶지 않다. 내 영혼을 좀먹는 먼지같은 사악한 모든 것들을 정면으로 막아내는 높디높은 경계석 하나쯤은 있어야 할게 아닌가.

 그 문턱은 바로 나의 율법이요 파수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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